돌에서 눈 From snow to stones
2024.4.18-5.1 Gallery Forever ☆
<전시 서문>
기획자 윤재원
Jaewon Yoon
엄유정의 작업은 작가가 바라볼수록 불가해한 대상을 자신의 눈과 손으로 인식해 나가고자 하는 시도의 연결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상은 작가의 생활반경 가까이에 있는 자연물이기도 하고 작가가 찾아 나선 풍경, 도시에서는 거리가 먼 곳에 위치한 자연인 경우도 있다. 그리고 대상을 인식해 나가고자 하는 노력은 끊임없는 눈길과 손길로 그림 위에 축적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되는 눈과, 돌, 암석 등이 소재로 등장하는 그림들은 작가가 사전에 연작으로 의도하고 작업한 것은 아니다. 이후에 작가가 그림을 나열해 보며 발견한 그림 속 형태의 유사성을 중심으로 하나의 연작처럼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유사성은 관람객 또한 전시에 배치된 그림의 흐름을 따라 관람하며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눈이 쌓인 나무와 풍경, 암석의 일부 등은 그림 속에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점차 시각적으로 유사함을 지닌 것으로 인식되고 특정 계절의 풍경이기보다 눈과 돌이라는 물질로, 서로 무한히 순환할 수 있는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 물질의 조합이 이뤄낸 형상으로 감각하게 된다. 이처럼 작가의 그림에서 계절이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시간의 개념을 일정 부분 망각하고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림 안에 남는 것은 비선형적인 시간이다. 아주 오래도록 서서히 변화하는 돌의 시간, 온도의 변화에 따라 형태가 빠르게 변화하는 눈의 시간이 하나의 그림이라는 네모난 규격 안에 담기게 된다. 이는 순차적으로 나열된 시간이 아니다. 작가가 선택한 장소와 물체를 중심으로 압축된 시간, 작가의 손의 속도로 재정립된 비선형적인 시간이 그림 안에 흐른다.
작가는 그림의 대상을 선택할 때 자신이 다가가기를 원하는 상, 캔버스에 떠오르길 바라고 마주하길 원하는 상을 기다린다고 이야기한다. 자신이 찾는 대상이 캔버스에 떠오르길 바라며 물감을 덧바르고 고치는 과정은 마치 초기 카메라가 온종일 대상을 향해 서서 하나의 은판 위에 상을 얻어내는 과정과도 닮아 있는 듯하다. 다만 엄유정 작가의 이 시간의 그림은 매끄러운 완결로 향해나가기보다 빠른 호흡, 느린 호흡이 섞여 있는 작가의 붓질과 함께 불균질한 표면을 간직한 채 마무리된다. 그리고 이 이미지의 불균질성은 언제든 다시 변화할 수 있는 자연의 모습과도 닮아있으며, 작가가 그림에 담는 자연이 통제 가능한 자연이기보다 스스로 무한히 변화해가는 자연 그 자체를 향해 있는 것과도 맥락을 같이한다고 본다. 이러한 끊임없는 과정을 내포하는 결말을 담은 작업이라는 점과 함께 앞서 이야기한 그림 속에 압축되어 있는 시간의 개념은 작가가 말하는 ‘평면은 정지되어 있는 동시에 무한의 세계 같기도 하다.’는 점과도 연동된다.
<작가 노트>
엄유정
Yujeong Eom
그림은 매번 다르게 보인다. 어떨 때는 느슨하고 어떨 때는 촘촘하다. 두껍고 얇다. 무겁고 상쾌하다. 그림의 고정되지 않은 시간을 생각한다. 평면은 정지된 동시에 계속해서 흐르는 무한의 세계 같기도 하다. 자연, 사물, 인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신체 또한 고정되지 않은 유연한 관계 속에 있다. 이차원의 세계에서 새로운 형상을 찾아 그 면면을 살피다 보면 쉽게 분류되지 않던 산발적인 대상들이 각각의 세계에서 드러나는 순간을 보게 된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들 사이에서 나와 내가 아닌 것들을 가늠해 보는 것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천천히 이해해가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