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ke it easy, you can find it (2014)


엄유정
Take it easy you can find it
 
 

유은순(미학)

   


보들레르는 1860년 전후 <현대적 삶의 화가>라는 에세이를 통해 현대의 삶을 사는 화가는 우연한 아름다움, 즉 시간이 지나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당대의 유행을 기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과 인터넷이 발달된 시대에 유행은 매일 기록되고 있으며 그 기록들은 인터넷과 SNS, 거리의 쇼윈도를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되면서 우리의 시각을 자극한다. 이렇듯 이미지를 과도하게 생산하고 소비하는 스펙터클 과잉의 시대에 사람들은 많은 정보들 중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것만을 재빠르게 습득하는 법을 배울 뿐 어느샌가 ‘보는 즐거움’은 간과해버리게 된 것 같다.
엄유정 작가는 어떤 기념비적이거나 장관을 이루지 않는 주변의 소소한 풍경을 그림으로써 우리가 어느새 잃어버렸던 ‘보는 즐거움’을 주고자 한다. 대신 이 ‘바라봄’의 문제는 회화의 형식적 실험을 거듭했던 20세기 모더니즘의 자기만족적 유희로 제시되지 않고 삶에서 흔히 마주치는 풍경을 주체가 어떻게 관찰하고 해석하며 재구성하느냐의 문제로 제시된다.
 

 

White Mountain 은 작가가 일정 기간 동안 아이슬란드에서 체류하며 주변의 산들을 매일 기록한 연작이다. 차들로 꽉 막힌 도로,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로 메워진 거리들, 출퇴근 시간대의 지옥철이 서울에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바쁜 풍경들이라면, 아이슬란드는 눈으로 뒤덮인 산에 드문드문 떨어진 집들만이 풍경을 채우고 있다. 빵 하나를 사기 위해 30분을 걸어야 하는 곳에서 작가는 그 나라의 정서에 주목하게 된 것 같다. 하얀 산들 속에 자리 잡은 오두막, 바다와 경계를 마주한 하얀 산과 북유럽의 차가운 공기를 담은 하늘이 서로 어우러진 장면은 습기 가득 찬 한국의 더운 여름 날씨의 관객들을 환기시킨다. 작가는 고요하고 심심할 법한 풍경을 오랫동안 관찰하면서 그 풍경에서 가장 좋은 빛과 조형적 구도를 찾아 캔버스에 옮긴다. 그는 새하얀 눈을 두터운 마띠에르로 구현하면서 외롭고 쓸쓸하면서도 따뜻한 시골마을의 정서를 담는다. 작품에는 사람과 풍경, 나무와 땅, 물과 하늘, 빛 등 각 요소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그보다 더 완벽한 조형적 완성은 없으리란 듯이 버젓이 위치 지어져 있으며 그 덕분에 풍경은 영원히 이어져 나갈 듯이 보인다. 


엄유정 작가는 이렇게 시간과 조형 모두를 포함하는 풍경의 순간을 포착하고자 한다.
 풍경을 끝없이 응시하다 나름의 의미를 발견했을 때 이를 기록하는 방식은 영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간의 한 순간, 마치 점과도 같은 찰나를 깊게 관찰해본 이 그 예이다. 작가는 흔하게 마주칠 법한 상황들 중에서 우연히 마주친 찰나, 닮은 모양의 차가 교차되는 순간, 제의적으로 땅을 둘러 걷는 친구의 모습, 고요한 해면에 파동을 일으키는 청둥오리 등을 발견하고 영상으로 기록한다.
 풍경에서 받은 인상을 보다 주관적으로 해석한 작품은 케이트 칼(Kate Carr)과 협업하여 만든 Tunnel 이다. 드로잉을 애니메이션화한 이 작품은 아이슬란드의 자연과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담담하게 표현한다. 여기에 케이트 칼이 아이슬란드에서 수집한 다양한 소리 - 눈 녹는 소리, 파도 치는 소리 등 - 를 편집하여 완성한 사운드 작업과 결합돼, 청각적이고 촉각적인 감각을 더한다.
 풍경은 어느 낯선 곳, 친숙한 공간, 심지어 어떤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작가는 풍경의 순간을 포착하여 그 풍경에서 느낀 정서적 감응을 캔버스에 옮기듯이 어떤 사람의 특정한 포즈가 드러내는 감정을 평면 위에 표현하고자 한다. 이는 사람의 몸짓에 그 사람의 행동양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데다 얼굴에서 드러나지 않는 감정도 몸짓에서 무의식중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몸짓 속에 숨겨진 정서를 드러내기 위해 얼굴과 옷은 최대한 단순화하고 과감한 검은 선으로 인물을 표현한다. 이로써 작가는 꾸며진 겉모습은 모두 내려놓고 그 사람을 온전히 볼 수 있도록 관객을 유도한다.
 <19개의 글렌 굴드>는 피아노와 대화하듯 연주하는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의 영상에 영감을 받은 회화 연작을 다시 애니메이션화한 작업이다. 기술 의존도가 낮은 페이퍼 애니메이션기법을 차용하여 기술의 차가움은 덜어내고 손맛에 담긴 감성을 더한다. 조곤조곤하게 피아노를 어루만지는 손짓이라던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피아노를 향한 모습이라던가 음악에 심취한 찰나의 표정에서 우리는 나름의 음악을 상상해볼 수 있다. 그는 영상의 한 장면을 포착하고, 정지된 장면을 회화로 옮기면서 대상에게 받은 인상을 보다 주관적으로 표현한다. 그리고 회화가 다시 영상화됨으로써 객관적인 실존은 사라지고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만이 남는다. 영상에서 회화로, 회화를 다시 영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통해 작가는 해석의 자기 재생산을 의도한다. 이는 기존의 영상이 포착하지 못한 풍부한 감정들을 회화를 통해 구현하고자 함이다.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에서 벗어났을 때, 강렬한 시각적 자극들로부터 벗어났을 때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된다. 작가는 자신이 보았던 풍경을 해석하고 구성하여 회화로 제시함으로써 눈을 현혹하는 화려하고 속도감 있는 이미지 속에 갇혀 해석과 재구성의 기회를 박탈당한 관객들을 환기시킨다. ‘괜찮아, 너는 찾을 수 있을거야.’ 라는 개인전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찾게 될 것이다. 풍경을 자세히 보는 법과 그 풍경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 방법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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